사회복지사인 나는/사회복지사의 사상

(사상) 꿈꾸는 사회복지사가 되자 (3)

강호철 2018. 5. 10. 22:22

가끔씩 동료직원이나 사회복지분야 관계자분들이 나에게 묻곤 한다.

 

, 사회복지분야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요?”라고.

 

이와 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러게나는 어떻게 이 분야에 몸담게 되었을까.”하고 맘속으로 자문자답하곤 한다.

 

항상 사회복지사로서 꿈과 신념을 강조하고 있는 사회복지사인데 말이다.

 

 

이때 어김없이 떠오르는 과거의 몇 가지 기억들이 있다.

 

대학교 1학년 시절 친구들과 보통사람들이라는 동아리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해서 사랑에 대해 열강하는 선배의 모습에 잘 선택했어. 이 봉사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동해야겠다.”라고 설레어했던 때, 선배와 함께 대학교에서 봉사활동 할 보육시설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보육시설 아동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초긴장상태에 빠졌던 그 순간, 보육시설 문을 들어서는 순간 해맑은 웃음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반겨주던 많은 아동들의 모습들이다.

 

1학년 마치고 군대 다년 온 후에 3학년말까지 검찰직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고 도서관에서만 죽치고 살다가 대학교 4학년 초에 나에게 맞는 직업이 무엇인가?”를 한 달여 동안 고민했었다. 지금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도대체 무엇이 나를 그렇게 동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하기만 할뿐이다.

 

그 깊은 방황과 고민 속에서 내가 선택한 것이 복지시설에서의 근무였다. 그 당시에 제주에는 사회복지학과가 없었고 또한 사회복지에 대한, 사회복지사에 대한 개념과 인식도 전무한 환경이었다. 그냥 막연히 사회복지시설이라는 곳이 있고 이런 시설에서 근무할 수 있구나 정도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회복지시설에 근무하기 위해서는 사회복지연수원 과정을 수료해야 한다는 것 정도만 대략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의 이런 생각과 결정이 바람직한 것인지 알고 싶어서 동아리 활동을 통해 가장 친했고 신뢰하던 친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이런 나의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때 그 친구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잘 선택한 것 같다. 그런데 혹 경제적 생활을 크게 생각한다면 택하지 않길 바란다.”라고 나에게 말한 것이다. 그 순간 그 친구가 정말 믿음직스럽고 고맙게 여겨졌다. 간단명료하게 내 머릿속의 잡념을 없애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때 당시에 그 친구의 말이 어떤 의미를 뜻하는 것이었는지는 한 참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 이후로 나는 사회복지연수원 과정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해줄 수 있는 사회복지시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봉사활동을 하고 있던 보육시설은 선배 중에 추천을 받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일찌감치 포기해버렸던 것이다. 그때 정말 큰 도움을 받았던 곳이 제주특별자치도사회복지협의회였다. 상담을 통해 도내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연락처와 그 밖에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나에게 상담을 해 주셨던 사회복지사가 지금도 같이 도 사회복지 현장에서 같이 근무를 하고 있다.

 

이렇게 얻은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나는 사회복지연수원에 추천을 해줄 수 있는 시설이면 무보수 형태라도 좋으니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전화를 돌리고 방문하여 면접을 보면서 4학년 1학기를 보냈다. 그때 당시 도내 거의 모든 사회복지시설로 전화를 돌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결과 당연히 2년 이상 준비했던 공무원 시험은 저 멀리 내팽겨쳐 버렸다. 이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리는 점이다. 3-4개월 정도 사회복지시설들을 알아보면서 부모님에게는 이러한 과정을 비밀로 부쳤기 때문이다. 어려운 삶 속에서 아들 공부 뒷바라지를 위해 많은 돈을 들였는데 말이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나의 선택이 잘못된 것 아닐까?”하는 생각에도 빠져보았다. 나름대로 학점을 잘 받았기에 학과 사무실로 들어온 추천서를 여러 번 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 기업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데 알아보고 있어서요. 다른 학과 친구들에게 주세요.”라고 조교에서 얘기했다. 그런데 나를 받아들여주는 사회복지시설이 안 나타나자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모 복지시설에서 부원장 면담에서 긍정적인 대화를 나누고 원장과의 면담이 오후에 잡혀 있었던 그 순간, 도서관에 있었던 나에게 학과에서 급히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가 보니 마지막 기업 추천서라고 이것마저 받지 않으면 앞으로 기회는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작성해서 가지고 와야 한다.”라고 조교가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정말 많은 생각과 망설임을 느꼈다. 오후에 긍정적 답변을 들은 복지시설 면접이 있는데, 그 면접을 포기할까, 아니면 마지막 추천서라는데 이것을 거머쥐어야 할 것인가. 이 두 가지 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내막을 모르고 계시는 부모님의 실망스러워하는 얼굴도 떠올랐다.

 

결국 마지막 추천서를 포기하고 나는 면접을 보러 갔고 그 결과는 채용하지 않겠다는 안내였다. 지금까지도 이 순간의 그 느낌은 나의 마음 한 켠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때처럼 나 자신이 무력하게 보였고, 그 동안의 노력이 다 허무하게 느껴졌으며, 공부가 싫어 헛된 꿈속에 나 자신을 집어넣은 것처럼 느껴졌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의 절망에 가까운 기로에서 그래 마지막이다. 아직 전화하지 않은 몇 몇 복지시설이 있는데 그 중에 한 곳으로 전화해서 거절당하면 이 꿈을 깨끗이 지우자.”라는 결심을 하고,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으로 모 복지시설로 전화를 하였고, 그 전화를 통해 지금 현재의 나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뭐랄까, 지옥과 천당을 한 순간에 느꼈다고 할까. 그래서 당시에 사회복지에 문외한인 나를 받아주고 사회복지연수원까지 수료할 수 있게 도움을 준 그 복지시설의 이사장님과 그 당시 총무님에 대한 나의 감사의 마음은 깊고도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원봉사활동을 제외하고는 사회복지분야에 대해 무지했던 내가 이와 같은 과정을 견디어내고 사회복지사의 길로 걸어갈 수 있게 해주었던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나는 모른다. 단지, 이런, 이런 경험들이 그 당시의 내가 그와 같은 생각과 결정을 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게 해주었던 것 같다는 막연한 추측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경험들 중에서 지금도 가슴을 설레게 만든 기억은 보육시설에서의 자원봉사활동 경험이었다. 보육시설에서 1년여 자원봉사활동을 하면서 내가 접한 것은 보육시설 아동청소년들의 꿈이 빨리 초등학교 졸업해서, 어서 빨리 고등학교 졸업해서 가고 싶다.’라는 것이었다. 이런 아동청소년의 꿈에 대해 동아리 동료와 선후배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가 공통 목표를 설정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보육시설 아동청소년들에게 새로운 꿈을 열어주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꿈의 방향을 대학 입학으로 설정하였다. 그때부터 우리 동아리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4월인지 5월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고등학생 대상으로 대입시험을 준비하려면 기간적으로 빠듯해보였기 때문이다. 보육시설 원장님을 찾아뵙고 우리의 뜻을 전했고, 동아리 회원들 중에서 자발적 추천 하에 과목별 담당자를 지정하였으며,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대입반 공부교실을 운영하기로 하였고, 교재도 준비했다.

 

이런 대입반 운영 봉사활동은 자발적인 것이기에 기존의 동아리 봉사활동과는 별도로 추가적으로 전개되었다. 대입반 운영도 보육시설 선생님 등의 지원 하에 당초 고3만을 대상으로 하려던 것을 고1학년까지 억지로(?) 확대시켰다. 이렇게 운영된 보육시설 대입반은 그 해에 1명의 고등학생을 대학에 입학하는 결실을 맺었다. 그때 어찌나 기뻤던지아마 그때 당시에 같이 봉사활동에 참여했던 멤버들 또한 그때 당시의 그 느낌을 지금도 잊지 못할 것이다. 이후 보육시설의 아동청소년의 꿈은 대학생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사회복지현장에서 나 자신이 변화를 강조하는 이유가 이와 같은 경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지금의 나는 여전히 을 꾼다, ‘변화의 꿈을 말이다. 힘든 순간도 있고 후회의 순간도 계속 접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꿈을 꿀 수 있고, 그 꿈을 위해 나갈 수 있고, 그 꿈을 이룸으로서 변화의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잊을 수 없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느껴보고 싶은 그 달콤한 맛에 대한 욕구가 아직도 나에게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