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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이라는 관념, 악마의 논리

강호철 2013. 7. 11. 15:51

경향신문을 읽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아래 기사([김종철의 수하한화] 국익이라는 관념, 악마의 논리) 내용이 너무나 미래를 향해 질주 하는 인류의 그릇된 자화상을 간결하게 짚어주고 있는 것 처럼 다가왔습니다.

 

 

------------------------------------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 경향신문 / 2013.7.10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 두 명이 사망자로 파악됐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시아나 여객기 샌프란시스코 공항 착륙사고를 보도하면서 어느 종편 텔레비전 앵커가 했다는 ‘멘트’이다. 항공기 사고란 대개 대참사로 이어지기 쉽고, 항공여행은 현대인에게는 불가결한 이동수단이다. 따라서 항공기 사고는 폭발적인 뉴스가 되기 쉽다. 더욱이 이번에는 대규모 인명 피해는 면했지만 비행기가 불타고 대파되는 큰 사고였다. 그 와중에서 정신없이 보도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멀쩡한 사람도 이성을 잃는 경우가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저 ‘멘트’는 너무도 난폭한 발언이었다. 이 상황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건 인간으로서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는 10대의 꽃다운 소녀들이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이 방송을 접한 많은 사람이 경악하고, 분개한 것은 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그런데 조금만 더 주의해서 들여다보면, 이 사건은 일회성의 단순한 방송 사고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당 방송사가 여론 무마용으로 내놓은 다음과 같은 해명을 보면 그 점이 더욱 확실해진다. “사망자 가운데 한국인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멘트였다. 하지만 생방송 중 매끄럽지 않게 진행한 점 사과드린다.”(채널A 7월7일자 보도자료) 이 설명에는 문제의 ‘멘트’가 왜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한 흔적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놀라운 것은, 사과할 것이 있다면 방송을 “매끄럽지 않게 진행한 점”에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즉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가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술적인 문제이지 도덕적·윤리적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해명 아닌 해명 속에는 왜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암시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생각은 무엇보다 ‘우리 입장’이라는 말을 아무런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이 쓰고 있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우리 입장’이라고 할 때, ‘우리’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가? 희생자의 죽음을 진실로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는데 꼭 희생자와 국적이 같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는 사실은 완전히 무시되어 있다. 물론 한국인이라면 한국인의 생사문제가, 중국인이라면 중국인의 생사문제가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이런 논법을 밀고 나가면, 같은 나라 사람 중에서도 동향인이나 동창생의 일은 내게 더욱 친근한 관심사가 될 수 있다. 내 친척, 내 친구, 내 가족에 이르면, 그냥 무조건 봐주고, 충성을 바치고, 호의를 베푸는 대상이 된다. 하기는 공자님도 아버지가 법을 어겼다고 아들이 고발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했고, <맹자>에는 짐승을 제물로 쓸 때도 늘 봐서 낯이 익은 놈보다는 낯선 놈을 쓰도록 배려하는 임금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혈연, 지연, 학연 등 개인적 인연에 따른 이러한 충성·호감의 이면에는 낯선 타자들에 대해서는 무관심 혹은 심지어 적대감이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좋은 사회, 좋은 삶을 진실로 바란다면, 이 점을 늘 잊지 말고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체로 거의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이 현상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실존적 한계일지라도, 자칫하면 사람 사이의 차별을 정당화하고, 나아가서는 야만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사 이래 인간사회를 짓눌러온 온갖 종류의 차별은 기본적으로 여기에 연유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끼리의 격심한 경쟁을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 차별을 극단적으로 심화·확대시켜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국익’ 논리가 결합되고, 그 결과로 식민주의, 제국주의, 파시즘이 형성되어, 세계가 끝없이 파괴·유린되어 왔다는 것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대로이다.국익 논리에 의거한 극단적인 인간차별을 둘러싼 가장 치열했던 논쟁이 바로 16세기 스페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른바 ‘인디오 논쟁’이다. 일찍이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당도하여 발견한 것은 한마디로 지상낙원이었다. 뜻밖에도 거기에는 풍요로운 자연환경에서 지극히 평화롭게 살아가는 낯선 인간사회가 있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황금과 노예와 토지를 대량 획득하기 위해서 그 지상낙원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로부터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타자(他者) 박멸작전이 시작됐던 것이다. 그러나 백인들도 사람인지라 그들은 처참한 살육과 노예화의 희생자들이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꺼림칙했다. 그리하여 원주민은 ‘인간’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가톨릭 사제 라스-카사스를 비롯한 소수의 목소리가 이에 저항하여, 대논쟁이 전개됐던 것이다. 압도적인 대세는 인디오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쪽이었다. 그것이 스페인 사람들의 ‘국익’ 논리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500년이 지난 지금도 스페인에서는, 물론 일부이겠지만, 여전히 라스-카사스라는 이름은 국익을 해친 매국노 혹은 공적(公敵)으로 기억되고 있다고 한다. 국익이라는 관념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벼랑 끝에 서있다. 이 위기상황은 예전처럼 국가적·민족적 단위에서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자민족, 자국 중심의 배타적 이익 논리이다. 그러나 이 배타적인 논리의 장기적인 결과는 비참한 공멸일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국익 논리는 ‘악마의 논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국익 관념에 붙들려 있는 한, 활로가 열리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폐색 상황을 타개할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지금 라틴아메리카가 가리키는 방향이다. 위키리크스 개설자 어산지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데 이어서 남미국가는 지금 국제적인 미아가 된 에드워드 스노든에게 망명을 허가하겠다고 나섰다. 제국과의 갈등이 초래할 ‘국익’ 손상을 각오한 이 용기있는 행동은 모든 양심적인 인간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