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적 삶 구현과/행복한 나

서원(誓願)과 욕심(慾心)의 주체인 인간(人間)

강호철 2016. 1. 26. 14:46

1. 들어가며


신문 등을 살펴보면 참 많은, 다양한 욕심(慾心)이 존재한다.”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권력에 대한 욕심, 재물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권위에 대한 욕심, 안위에 대한 욕심 등등 말이다.


그리고 이 욕심(慾心)으로 인해 피폐해지는 것은 결국 자연이고 우리 인간 자신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욕심(慾心)이 있는 곳에는 항상 슬픔과 분노와 다툼 그리고 기쁨과 희열, 만족 등이 상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이 두 가지 상반된 상태는 항상 한쪽에만 집중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먹이사슬과 같이 얽혀있고 순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人間)에게서 욕심(慾心)은 왜 생기는 것일까? 나는 인간의 인식(認識)에 의해 욕심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져보았고, 이와 같은 생각을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하였다.


아래의 글은 이런 생각과 판단을 개인적 관점에서 기술해 본 것이다.


2. 인식(認識)이란 무엇일까.


인식(認識)에 대해 인간은 인식 과정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객관 세계(자연사회)에 대한 인식(지식)을 획득하고, 이 성과에 기초하여 객관 세계에 작용을 가해 이것을 변화 시키고 개조한다.’고 지식백과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본 설명에 의하면 인식(認識)은 ‘(1) 객관 세계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는 행위 (2) 이와 같은 인식이라는 성과에 기초하여 객관 세계에 작용을 가해 이것을 변화시키고 개조하는 행위로 나뉘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개인적 차원에서 (1)에 해당하는 인식 과정은 인지(認知)에 해당하고 (2)에 해당하는 인식 과정은 행위(行爲)에 해당한다고 구분 지어 보았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인지(認知)의 본질은 판단이며 판단을 통해 어떤 대상은 다른 대상과 구별되고, 그것이 어떠한 개념 또는 몇 가지 개념에 의해 특징지어지는지를 규정하는 것(네이버 지식백과)이고, 행위(行爲)는 윤리학상으로는 분명한 목적·동기를 가지고 사려·선택·결심을 거쳐 의식적으로 행하는 인간의 의지적 말이나 행동을 말하고, 법학상으로는 법적인 효과 발생의 원인이 되는 의사(意思) 활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식(認識)인지(認知)+행위(行爲) 또는 인지(認知)->행위(行爲)의 상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3. 욕심(慾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만약, 상기와 같은 인식(認識)에 대한 나의 생각이 맞는다면 욕심(慾心)은 인식(認識)의 상태에서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인간이 객관세계에 대한 인지(認知)를 바탕으로 이 객관세계에 일정한 작용을 가해 변화시키고 개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즉, 인지(認知)를 바탕으로 행위(行爲)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욕심(慾心)이 탄생,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보았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보면 욕심(慾心)은 그 존재 자체가 정말 순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욕심(慾心)의 순수성에 대한 추정 하에 나는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뜻을 갖고 일반적 욕심(慾心)과는 다른 그 어떤 의식 상태로 정의를 내리고 싶은 마음에 대체할 수 있는 단어를 한번 찾아보았는데, 그 대체어로 선택한 것이 바로 서원(誓願)이다.



욕심이 너무 적으면 의지박약, 너무 많으면 과욕이다.

인생은 열심히 목표에 도전해야 하는 것이지만,

어떤 일에 대해 과감히 체념하는 것도 도전 못지않게 필요하다.

체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불굴의 신념이란 어느 적어도 가능성을 보고 덤비라는 것이지

무작정 마음만 앞서면 이는 시작부터 옹졸한 것이다.

체념을 잘하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과욕은 반드시 후회를 낳는 법이다.

(주역인문학 / p264)


서원(誓願)은 종교적 용어로 불교에서는 신불(神佛)이나 자기 마음속에 맹세하여 소원을 세움이라는, 카톨릭에서는 보다 선하고 훌륭하게 살겠다고 하느님에게 약속하는 행위를 그리고 원불교에서는 원()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고자 맹세하는 일을 뜻한다고 한다.


정리를 한번 하고 넘어가 보자.


인간은 인지(認知) -> 서원(誓願) -> 행위(行爲)’라는 인식(認識)의 주체이다.


그렇다면, 욕심(慾心)?


욕심(慾心)객관적 세계(인간, 사회, 자연 등)를 대상으로 보다 선하고 훌륭하게 살겠다는 약속인 서원(誓願)에서 객관적 세계가 로 변화되어진 또는 변화되어가는 과정상의 존재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달리 말하면, 서원(誓願)이 양(+)이라고 한다면, 욕심(慾心)은 음(-)인 것이다.


4. 서원(誓願)과 욕심(慾心)의 주체인 인간(人間)


그러면 서원(誓願)은 왜 욕심(慾心)으로 변화되는 것일까? 도대체 이 양자 사이에 어떤 기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행위(行爲)에 대해 음미해보도록 하자.


법철학 관점에서는 ‘(1) 행위(行爲)는 목적을 외적 객관성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가 의지에 귀책 될 때에는 그것이 객관성에서 지니는 가치(-부정, -, -불법)에 관한 의지의 지식에 따르는 것이라는 주장과 (2) 행위(行爲)는 변혁(Veränderung)이며, 변혁은 현실적 세계에서 승인되어야만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는 세계 속에서 타당한 것에 - 의지의 지식 여하에 관계없이 - 어쨌든 적합해야만 한다.’2가지 주장이 있다고 한다.


나는 행위(行爲)는 목적을 외적 객관성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가 의지에 귀책 될 때에는 그것이 객관성에서 지니는 가치(-부정, -, -불법)에 관한 의지의 지식에 따르는 것이라는 주장에 손을 들고 싶다.


그 이유는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 대한, 타인의 생각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객관적 세계를 기준으로 나 자신을 객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객관적 세계에서 나 자신을 특별화 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 인간은 인식(認識)을 통해 즉, ‘개관적 세계에 대한 인지(認知) -> 객관적 세계에 대한 변화 행위(行爲)‘라는 틀 속에서 서원(誓願) 또는 욕심(慾心)을 표출시키는 존재 > 라고 조작적 정의를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이와 같은 나의 생각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 원불교 대종경수행품 36장편에 욕심은 없앨 것이 아니라 도리어 키울 것이니, 작은 욕심을 큰 서원으로 돌려 키워서 마음이 거기에 전일하면 작은 욕심들은 자연 잠잘 것이요, 그러하면 저절로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리라”>라는 구절이 있으며, 이는 제거해야 할 욕심이 아닌 큰 서원으로 키워야 할 정당한 욕심을 함께 밝히고 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 인간의 목표는 무엇인가?

뜻이 위대하면 그 또한 위대한 것이다.

인생이란 성공해야만 위대한 것은 아니다.

숭고한 정신을 가지고 목표에 도전할 수 있는 자체로서 이미 위대한 것이다.

(주역인문학 / p262)


어쩌면 철학적인 삶이란 인식의 틀 속에서 서원(誓願)과 욕심(慾心) 사이를 오가는 번뇌와의 동행 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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