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photo diary

영화 사도(思悼)를 보고...

강호철 2015. 9. 29. 01:51

 

(네이버 영화에서 스크랩)

 

영화 '사도(思悼)'의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영상미도 돋보였고 영화음악도 좋았다.

 

영조(英祖: 1694~ 1776, 조선 제21대 왕)를 연기한 송강호와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를 연기한 유아인은 125분이 마치 10여분도 안되는 것처럼 관객들을 스크린 안으로 빨아들였다.

 

(네이버 영화에서 스크랩)

 

섬뜩함도 느꼈고, 애절함도 배어 있었으며, 씁쓸함과 더불어 안타까움도 스멀스멀 솓아 올라왔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아쉬움이 짙게 드리워졌기 때문이다.

 

(네이버 영화에서 스크랩)

 

당파싸움의 희생양이며,

제도와 예법의 희생양이고,

왕권의 희생양인 사도세자(思悼世子)

(* 사도세자(思悼世子)는 후일 장헌세자, 고종때 장조로 추존됨)

 

(네이버 영화에서 스크랩)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살가운(다정한) 말 한마디였소."라는 애절함에서

부(父)가 아니라 돈을 벌어오는 가족 구성원으로 전락하고 있는 남자(아빠)의 모습이 스쳐지나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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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 나는 임금도 싫고 권력도 싫소... 나는 그렇게 살기 싫고 그렇게 할 수도 없고 나는 내 식대로 하겠소!"라는 절규속에서

 

가출 또는 비행이라는 행동을 택할 수 밖에 없었을 청소년들의 모습이 떠올랐으며

 

(네이버 영화에서 스크랩)

 

"공부나 예법이 사람보다 먼저요,사람이 먼저요?"라는 외침에서

 

좋은 대학을 위해, 좋은 직장을 위해, 돈과 권력을 움켜쥘 수 있는 출세를 위해,

동심(童心)과 우정(友情) 등을 사치로 여겨야 하는 청소년들의 아픈 성장이 느껴졌다.

 

(네이버 영화에서 스크랩)

 

반면에

 

"당신은 어찌 세자만 생각하오. 나는 당신의 지아비오... 부부란 서로의 실수는 덮어주고 사소함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끊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 사람나고 예법있지 예법나고 사람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공자도 그랬습니다. 사람의 말단을 보지 말고 마음을 보라고, 저는 그날 아비의 마음을 보았습니다"라는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어린 정조(正祖)의 목소리에서

 

허례허식에 묶여있지 않으려는 자유로운 영혼과 그 굳건한 신념을 느낄 수 있었다.

 

 

(네이버 영화에서 스크랩)

 

그런데 왜, 이와 같은 자유로운 영혼과 신념은 '뒤주'안에서 사장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단지, 아버지인 영조(英祖)와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사도세자(思悼世子)의 기행에서만 그 원인과 이유를 찾기에는 무언가 부족해보였다. 아니 많이 부족해보였다.

 

(네이버 영화에서 스크랩)

 

"그럼 그 원인이 무엇일까?"

 

영조(英祖)가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정조(正祖)에게 "잘 하거라. 자식이 잘해야 아비가 산다... 네가 실수할때마다 내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아느냐... 왕이 무엇이냐, 신하가 무엇이냐... 왕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다. 신하들의 결정을 윤허하고 책임을 묻는 자리이다!"라고 가르치는 대사에서 간접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욕심(慾心)'에서 그 원인과 이유를 찾고 싶다. 

 

먼저, 욕심(慾心)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자.

 

한자 어원 차원에서 살펴보면, 욕심(慾心)'갖고 싶다, 하려고 하다'의 뜻을 갖는 (하고자할 욕)에다 (마음)을 두 번 더한 글자'가 바로 욕심(慾心)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을 바라다. 장차 ~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 되면 그 순간 (욕심 욕)이 생기게 되며 여기에 다시 한 번 더 (마음)을 더하게 되면 욕심(慾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욕심(慾心)은 사전적으로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죽음 뒤에 어떤 욕심(慾心)이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나는 다음과 같은 욕심(慾心)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네이버 영화에서 스크랩)

 

첫째, 소론과 노론 사이의 정쟁을 바탕으로 주요 권력을 점하려는 당파적 욕심이 존재했다. 잘 알다시피 영조는 노론을 배제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사도세자는 소론의 지지를 받는 입장이었다.

 

(네이버 영화에서 스크랩)

 

둘째, 소론과 노론 당파 싸움에서 왕권을 지키려는 영조의 욕심이 존재했다. 영화 중에 영조가 내뱉은 "왕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다. 신하들의 결정을 윤허하고 책임을 묻는 자리이다!"라는 말에서 그 욕심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영조(英祖)에 관한 안내 내용 처럼 소론이 득세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론의 힘을 업고 왕이 되었고, 이후 '임인삼수옥(壬寅三手獄) 사건, 을사환국(乙巳換局), 정미환국(丁未換局), 무신란(戊申亂) 등을 겪으면서 지켜냈던 왕좌이기에 그 욕심은 더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욕심으로 인해 아들인 사도세자에게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공부'를 강조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신하에게 흠잡히는 왕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신념이 강했을 것이다. 또한 이외에 노소론 사이의 정쟁 하에서 영조가 터득한 통치의 기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왕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다. 신하들의 결정을 윤허하고 책임을 묻는 자리이다.'라는 것이었으리라. 나의 입장에서는 '책임회피식 리더십'이라고 지칭하고 싶다. Bottom up리더십을 발휘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절대권한을 가진 왕으로서의 결정적 결정을 회피하고 그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렸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기야 신하들이 왕을 만들어내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기에...

 

영조(英祖)는 숙종의 세 아들(景宗·英祖·延齡君) 중 둘째로서, 1699(숙종 25)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으나 어머니(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의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노론 유력자인 김창집(金昌集)의 종질녀로서 숙종 후궁이던 영빈(寧嬪) 김씨의 양자노릇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숙종 말년 왕위계승문제가 표면화되었을 때 그 이복형인 왕세자(후일의 경종)를 앞세우는 소론에 대립했던 노론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1721년 숙종이 승하하고 왕세자가 즉위해 경종이 되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고 또 아들이 없었다. 이에 노론측은 앞서 숙종 말년에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의 독대에서 논의된 대로 연잉군이던 그를 경종의 후계자로 삼는 일에 착수하였다.

 

정언 이정소(李廷熽)의 세제책봉상소를 계기로 영의정 김창집·좌의정 이건명(李健命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 이른바 노론4대신의 요구와 이들과 연결되어 있던 왕실의 최고 존장자인 대비 김씨(숙종의 제2계비인 人元王后)의 삼종혈맥(三宗血脈)논리의 지원을 받아 연잉군이라는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그는 경종의 뒤를 이을 왕세제로 책봉되었고, 1724년 경종의 죽음에 따라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었다.

 

왕위에 오른 직후 영조(英祖)는 왕세제책봉과 대리청정에서부터 노소론간의 당론이 충역론으로 확산되면서 자신이 바로 그 정치적 소용돌이의 핵심에 처하여 생명까지 위협받는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분등설(分等說)과 양치양해(兩治兩解쌍거호대(雙擧互對)'라는 방침 하에 공동정권을 구성하는 조제(調劑)형태의 탕평책(붕당타파)을 실시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발췌)

 

(네이버 영화에서 스크랩)

 

셋째,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욕심이 없었다. 아니, 욕심이 없었다기 보다는 욕심이 꺾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나라 군대가 당신들 친목을 도모하는 곳이오? 모든 명령체계를 단 하나로 통합하라!"라는 호통과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라는 가르침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기 싫고 그렇게 할 수도 없고 나는 내 식대로 하겠소!"라는 강한 의지 표현을 보면, 사도세자(思悼世子)에게는 욕심 - Top down형태의 절대 왕권을 도모했던 것 같다. 영화에서 보면 시스템의 단일화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 이 있었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그럼 어떤 원인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욕심을 꺾어버린 것일까? 영조의 양위 파동과 대리청정이 아닐까?

 

곰곰히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영조(英祖)의 양위 파동과 대리청정이 사도세자를 위한 것인가?".

 

영화를 보면 그런 측면은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렇다면 영조(英祖)는 왜 양위 파동과 대리청정 등을 행했을까? 어쩌면 소론과 노론 그리고 왕실의 최고 존장자인 대비 김씨(숙종의 제2계비인 人元王后)와의 삼각관계에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자 수단으로 활용한 것은 아닐까? (이 점에 대해서는 추가적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향후 첨삭하고자 한다.)

 

 

이렇게 영화 사도(思悼)를 본 소감을 정리하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다.

 

바로 욕심(慾心)으로 인한 업()의 윤회(輪廻)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사에 욕심(慾心)이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기에 "어떻게 하면 이에 따른 업()의 윤회(輪廻)를 부정화시킬 것이 아니라 긍정화시킬 것인가?"가 고민스러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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