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11코스에서

 

사순의 시작이다. 

 

부활절(2020.4.17) 40일 전, 재의 수요일(2022.3.2)에서 시작해 성토요일에 끝난다. 4세기경부터 시작되었는데, 예수가 세례를 받은 뒤 40일 동안 황야에서 금식을 하고 사탄의 유혹을 받으며 보낸 기간을 기념해 생긴 관습이다.

 

미사를 보는 중에 루카 복음 말씀(4,1-13)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생각들이 출렁거렸었는데... 이렇게 정리를 해본다.

 

한편으론 "복음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자의적으로 해도 될까?"라는 생각도 드는데... 그냥 편안히 말씀을 통해 내 마음 속에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보는 기회로 다가서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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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ㅇ물로 세례를 받음

 

. '세례'라는 것은 그 순간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설까. 

. '세례'를 통해 모든 것이 변할까. 그렇게 믿고 싶을 것이다. 

. 막스 프레쉬는 이렇게 말하였다, "시간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시간은 단지 우리를 펼쳐 보일 뿐이다."라고...

. 세례 그 자체만으로 우리는 변화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세례를 통해 미래의 나 자신을 새롭게 펼쳐 보일 수 있을 뿐 아닐까. 즉, '세례'는 '변화의 시발점' 아닐까. 물론 그 변화의 가능성에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확신, 신념, 믿음 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인간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세례'는 '변화의 시발점 또는 발화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ㅇ광야

 

. 나는 '광야'를 '내면의 세계'로 인식하였다. 세례를 받기 전과 세례를 받은 후의 내면이 혼재되어져 있는 곳, ‘변화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한 상태 말이다.

. "변화의 힘을 활용해라. 변화를 적으로 인식하는 리더는 직장에서 실패하게 된다. 변화는 하나의 불변의 상수와 같은 요소로서 성공적인 리더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업무환경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잭 웰치'의 말을 음미하면 좋을 듯 싶다.

 

ㅇ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다.

 

. 이 문장은 '성령은 세례를 받은 모든 자를 광야로 이끈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럼 성령은 광야에서 우리가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는 것일까.

. 아마 긍정의 결과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긍정의 사고'를 먼저 갖는 것이 중요함을... 부정은 '할 수 없음을 결정하는 포기'이며, 긍정은 '할 수 있음을 확정짓는 행동'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생각'을 그대로 뿌리 채 뽑아 던져버리기를 원하는 것 아니었을까.

. '마하트마 간디'의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보고 싶다면, 너 스스로 변해야 한다."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 성령은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맹자)"는 것을 우리 스스로 깨닫길 원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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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 '말씀'이 중요함을 강조한 표현으로 알고 있지만,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충족에 치중하지 말라."는 의미도 내포되어져 있다고 받아들였다.

. 즉, "기쁨은 사물 안에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다.(리하르트 바그너)"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 이다.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 이 문장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면, 나는 아래 3가지라고 본다.

. 첫째, ‘권세와 영광을 섬기지 마라... 권세와 영광은 주 하느님이 악마에게 주신 것이다... 삼라만상에 대해 겸손해져라, 욕심내지 말고, 소유하려 하지도 말아라.
. 둘째,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려라. 감사하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인생에서 나쁜 일이 아닌 좋은 일에 집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에이미 반데빌트) 

. 셋째, 손해를 본 일은 모래위에 기록하고, 은혜를 입은 일은 대리석 위에 기록하라.(벤저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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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 '광야'를 '내면의 세계'로 생각하게 된 것도 좋은 성찰의 기회였지만, '천사'의 개념을 재해석하게 된 것도 정말 맘에 드는 묵상의 기회였다. 
. 한번 생각해보자. 상기 말씀 중에서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는 표현중 '천사'는 나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관계를, 가치를 갖는 존재일까. 

. 나의 삶에 있어서 나와 함께하는,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이 나를 보호하고, 받쳐주는 천사’가 아닐까.

. 혜민스님은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라고 하였고, 니체는 "사람의 가치는 타인과의 관계로서만 측정될 수 있다."고 하였으며, 고토 신페이는 "돈을 남기면 하수, 업적을 남기면 중수, 사람을 남기면 고수"라고 하였고, 짐 콜린스는 "성공이란 세월이 흐를수록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나를 점점 더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 단순히 '포기했다, 물리쳤다, 이겨냈다 등'과 같은 의미로 무심코 지나버릴 문장일 수 있겠지만... 이외에 아래와 같은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하지만, 고난의 극복으로도 가득하다.

. 회의주의자는 바람을 탓하고, 낙천주의자는 방향이 바뀌기를 기다리지만, 리더는 상황에 맞춰 항해를 조정한다.(존 맥스웰)

. 중요한 것은 큰 뜻을 품고 그것을 완수할 수 있는 기능과 인내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모두가 중요하지 않다.(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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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주님 승천 대축일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40일째 되는 부활 제6주간 목요일에 지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부활 제7주일로 옮겨 지낸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눈앞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화와 부활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듯이 부활과 승천 또한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고 떠남심이 아니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는 주님 약속의 이행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분을 믿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든 시간에 대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승천은 주님께서 떠나심과 동시에 우리에게 새롭게 찾아 오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의 또 다른 의미는 우리에게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보고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땅의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살고, 세상의 기준으로 나의 삶에만 집중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다하고 복음을 전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어제 판공을 보는 중에 신부님에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지고 계신 십자가는 당신의 것도 아니고 당신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십자가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라...

 

곰곰히 생각해보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실때, 아니... 어쩌면 구유에 태어나실때부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계셨던 것 같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 성부이신 성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태어나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시기까지 하신 것일까?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알고 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희생'을 바탕으로... 그렇다고 현재 우리 인간이 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것은 '구원' 그 자체의 완성이 아니라, 그 구원의 기회를, 조건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그 기회에 대한 선택은 여전히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 구원의 관계는 선물로 주셨지만 그 관계를 이을 것인가, 아닌가는 여전히 우리 인간의 몫으로 남겨주신 것이다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오늘 아침에 읽은 '묵자 이야기'중에 "한 사람이 변화 정도에 따라 그를 중심으로 한 세상이 그 정도로 변한다."라는 글귀가 떠오른다. 성서에도 '질그릇'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

 

우리 인간은 다양한 그릇의 모양을 갖추고 있고, 그 모양에 따라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질그릇이 다른 그릇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욕심'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형태의 변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서 말씀이 그 불가능을 얘기하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어쩌면 성서의 말씀은 물리적인 것에 기초해서 말씀하고 있지 않다고 봐야할 것이다. , 물리적 사고에서 탈피해서 생각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어린왕자 '두번째 이야기'에서~] "설령 고약한 이웃이 있더라도 그저 너는 더 좋은 이웃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야. 착한 아들을 원한다면 먼저 좋은 아빠가 되는 거고, 좋은 아들을 원한다면 먼저 좋은 아들이 되어야겠지. 남편이나 아내, 상사 및 부하직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간단히 말해서 세상을 바꾸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자신을 바꾸는 거."

 

이와 같은 '질그릇의 비유''십자가' 의 의미는

 

첫째,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깨닫고 키우라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둘째, 그 자존감을 자신만을 위해 키우지 말고 '가정과 지역주민(사회)의 바람직한 상태로의 변화'라는 방향으로 촛점을 맞추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셋째, 그 변화를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1차 희생)을 다하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넷째, '자신의 1차적 희생 하에 가정과 지역사회의 변화를 위한 희생(2차적 차원)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과정에서 '노력과 희생 없이 분에 넘치는 욕심을 가지지 말라(겸손)'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고 사료된다.

 

 

 

 

우리 인간은 지구의 자연적 존재들과 대비해서 그렇게 외형적 그릇이 큰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인간이 지구상의 생태체계에서 가장 상위에 위치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질그릇'이 외형적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질그룻'은 인간이 잠재적 내면 세계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 인간은 성찰을 통해 우주를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존재이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나의 존재의미를 깨닫고, 그 존재의미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변을 위한 희생을 즉,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하라'라는 뜻을 알려주신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우리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축복받은 창조물인 것이다. 아멘~!

 

 

 

프란치스코 교황은 16일(2014년 8월)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를 복자로 선포하는 시복식 미사를 직접 집전했다.

다음은 그의 강론 전문이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

 

성 바오로는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의 영광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 신앙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키시어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셨고, 그분의 승리는 또한 우리의 승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승리를 경축합니다. 이제 그분들의 이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 옆에 나란히 함께 놓이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저는 그분들에게 공경을 드렸습니다. 이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환희와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함께 참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선사하셨음을, 순교자들은 성 바오로와 함께 증언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순교자들의 승리, 곧 하느님 사랑의 힘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오늘날 한국 땅에서, 교회 안에서 계속 열매를 맺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처럼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복자 바오로와 그 동료들을 오늘 기념하여 경축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여명기, 바로 그 첫 순간들로 돌아가는 기회를 우리에게 줍니다. 이는 한국의 천주교인 여러분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기를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한국 땅에 닿게 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민족,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적 호기심과 종교적 진리의 탐구를 통해 촉발되었습니다. 복음과 처음으로 만난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더 많이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한 무언가의 깨달음은 곧 주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첫 세례들과 더불어 충만한 성사 생활과 교회적 신앙생활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선교 활동의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전통적인 사회적 신분의 차별과 상관없이, 믿는 이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초대 교회의 삶(사도 4,32 참조)에서 영감(靈感)을 받아, 한국의 신자 공동체들 안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평신도 소명의 중요성, 그 존엄함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저는 여기 있는 많은 평신도 여러분에게 인사를 드리며, 특별히 날마다 삶의 모범으로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화해시키시는 사랑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인 가정에 저의 인사를 전합니다. 또한 여기 있는 많은 사제들에게도 특별한 인사를 드립니다. 그들은 헌신적으로 행하는 직무 수행을 통해, 지난 세대의 한국 천주교인들이 일구어 온 풍요로운 신앙의 유산을 지금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진리로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간청할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기를 청하지 않으셨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어 세상 안에서 거룩함과 진리의 누룩, 즉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이 땅에 믿음의 첫 씨앗들이 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당신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요한 17,14 참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박해를 의미했고, 또 나중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게 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즉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또한 순교자들은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 증언의 순수성이었고,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오늘의 이 경축을 통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마음에 품고 기리고자 합니다. 특별히 지난 마지막 세기에,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그분의 이름 때문에 모진 박해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리며 기억합니다.

 

오늘은 모든 한국인에게 큰 기쁨의 날입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 곧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그들이 신봉하고자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 이를 향한 연대성, 이 모든 것이 이제 한국인들에게 그 풍요로운 역사의 한 장이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유산은 선의를 지닌 모든 형제자매들이 더욱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서로 화합하여 일하도록 영감(靈感)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에서 평화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인간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전구와 더불어 모든 한국 순교자들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온갖 좋은 일과 믿음 안에서, 또 한결같이 거룩하고 순수한 마음과 사도적 열정 안에서 항구함의 은총을 받아, 사랑하는 이 나라에서부터 아시아 전역을 거쳐 마침내 땅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증언하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잠시 쉬면서 인권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하느님은 어떻게 우리 인간들을 사랑했을까, 그리고 그 사랑을 어떤 모습으로 보여주고 계신가?”

 

나는 구약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라고 알고 있다. , 피조물은 창조자의 계명을 지켜야 했고, 이를 어길 시에는 그에 따른 심판이 뒤따랐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구약시대에 계율을 지키지 않는 인간들에게 내리신 대홍수 심판일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게 되자 문뜩 대홍수 심판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기분은 어땠을까?”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하느님이 매우 가슴 아파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이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자녀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부모가 자녀의 생명을 심판했다고 가정해보자(한 자녀만 살리고). 그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그리고 내린 후, 결정을 실행에 옮길 때와 실행에 옮긴 후 시점에서의 부모 마음은 어땠을까. 찢어지게 아팠을 것이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통곡과 함께.

 

이런 마음이 들자 어쩌면 구약시대 대홍수와 관련해서 설명되어지는 홍수와 천둥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는 슬픔과 아픔의 모습일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구분 짓는 성자이신 예수님의 존재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고심하게 되었다. 즉, 단순히, 아무런 이유 없이 하느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자녀로 들어 올림을 하고자 했을까, 다른 또 다른 마음이 없었을까, 어쩌면 대홍수에 의한 심판으로 인한 하느님의 피조물 인간에 대한 큰 사랑을 다시 한 번 더 보여주시는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대홍수 심판 이후 하느님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어떤 결심을 하셨을까?

 

대홍수 심판이 있은 후에 하느님은 앞으로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이 창조한 사랑하는 피조물의 생명을 취하는 행위를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그와 함께 사랑하는 자신의 피조물(인간과 동물, 식물 등을 포함)의 생명을 취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속죄하고 싶은 마음이 드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심신을 본떠 창조되었기에 분명히 심성에 따른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에 하느님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인간을 자신의 자녀로 받아들이고자 결심하시지 않았을까, 자녀의 생명을 취하는 부모는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에.

 

그리고 이러한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 하느님은 2가지를 선 해결하고자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첫째는 피조물인 인간이 지은 원죄를 씻어줄 필요성이다

둘째는 창조주 입장에서 피조물의 생명을 취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미안한 맘을 지울 필요성(: 자녀양육에 대한 책임감에 의해 자녀보고 자기의 종아리에 회초리질을 하게 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정리되자, 나는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처형에 의한 돌아가심을 다음과 같이 재해석 해보았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너무 사랑하기에, 삼위일체중 성자로 가장 미천한 가정의 자녀로 탄생(창조주이면서 피조물이 되는 낮춤을 보여주심 / 인간을 자녀임과 더불어 형제, 자매로 받아 올리심)하셨고, 인간(피조물)에 의해 배신과 모욕 속에 십자가 처형을 받아들이셨다(인간의 원죄 해소와 피조물인 인간에 대한 사랑의 아픔 치유).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의 자녀이면서 성부의 형제, 자매로 받아 올려 진 인간 모두가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품안에서 십계명을 지킴과 동시에 심판 대신에 회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성령이라는 은총을 보내주셨다.”라고.

 

다른 사람끼리 함께 하는 길

프랑스 테제공동체 알로이스 원장 수사 인터뷰

한겨레신문 / 2013.10.29. /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프랑스 테제공동체 원장 알로이스 뢰저(59) 수사가 WCC(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참석차 방한했다.

 

5일간 북한을 방문하고 온 그는 28일 서울 정동 성공회대성당에서 오후 대화모임에 이어 일치기도회를 이끌었다. 대성당엔 개신교인, 천주교인, 성공회 신자 등 다양한 종교인들이 가득 메워 일치를 체험했다

 

그는 독일 출신이다. 청년시절 테제공동체를 찾은 뒤 1년간 자원봉사자로 일하다 20살이던 1974년 입회했다. 입회전 그의 종교는 천주교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혁교회(개신교) 출신으로 1940년대 테제를 창설한 로제 수사의 영성에 함께 하기 위해 교파를 초월한 초교파공동체 테제를 택했다. 200590살로 사망한 로제 수사가 지명하고 소속 수사들이 동의함에 따라 그는 2대 원장이 되었다

 

테제공동체는 그리스도인이면 교파를 가리지않고 수도자로 입회할 수 있다. 수사 100명 가운데 개신교인과 천주교인이 절반씩 정도다. 유럽의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들이 줄어가는 상황에서 테제공동체엔 1주일 이상 머무는 젊은이들만 연간 5만 명에 이를 정도다. 테제공동체는 교리를 넘어선 침묵의 영성으로 방황하는 세계의 젊은이들의 영적인 길라잡이가 되고 있다.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하는 WCC의 에큐메니칼(일치)을 삶에서 실천하는 대표적인 수도원이다. 알로이스 원장 수사를 성공회 대성당에서 만났다.

 

-한국의 일부 보수교회들은 WCC의 다양성을 거부하며 총회를 반대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도 항상 분열의 위협을 겪어왔다. 초대교회부터 다양성이 존재했다. 하지만 일치는 그리스도께서 명령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귀를 기울여야지 어느 누구도 제외시켜서는 안된다.”

 

-한국 보수교회가 왜 그렇게 배타적이라고 보는가.

 

배타성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진리가 훼손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과 역사적 상처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자기 교파가 진리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도 진실이지만 우리가 진리 안에 있기 위해서는 함께 해야한다는 것도 배워야한다.”

 

-배타하고 분열하는데 다 나름의 이유와 주장이 있다.

분열을 합리화 정당화할 때 더 힘들어진다. 그러면 복음메시지가 더 이상 통하지 않고 복음의 힘이 사라지게 된다. 어느 교파에 속하든 테제에선 한 지붕 아래서 서로 깊게 일치하며 감격해 한다. 테제에서 가능하다면 왜 다른 곳에서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는 한분이지만 교리가 다른데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신학적 합의를 기다리지 말고 그 분 아래서 살아가기에 용기를 낼 수 있다. 모든 게 같아서 함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 되길 원해서 함께 모이는 것이다. 분열을 가지고 모이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속한다. 그리스도인들끼리도 함께 모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새로운 시대의 물음에 응답할 수 있겠는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가.

=오직 용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특별하고 고유한 가르침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한다면 이 말씀을 외면할 수 없다. 용서는 기나긴 과정이다. 작은 걸음이라도 한발자국씩 내디딜 때만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북한과 어떻게 화해하고 일치를 이룰 수 있겠는가.

남북이 서로 상처가 너무 깊다는 것을 목도했다. 그러나 한쪽이 잘못했더라도 과거의 잘못만 따진다면 화해로 갈 수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상처와 쓰라림을 다음 세대까지 전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상처 입은 이들은 쉽게 용서하려들지 않는다.

“2차대전 뒤 독일인들은 폴란드인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폴란드인들은 용서하고 화해했다. 저희 부모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고향마을에서 소수민족으로서 쫓겨나 돌아가실 때까지 그 상처로 힘들어했다. 그러나 우리 세대에선 이를 극복하고 화해의 걸음을 내딛어야한다. 학대 받으면서도 아무도 위협하지 않으신 예수를 믿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연민을 가져야 한다.” 

 

-테제공동체에 입회에 당신이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유일무이한 사람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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